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/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(문단 편집) === [[윤보선]] === || [[파일: Park_ch_Yun_ps.jpg|width=100%]] || [[윤보선]]은 [[4.19 혁명]] 이후 들어선 [[대한민국 제2공화국]]에서 [[민주당(1955년)|민주당]] 구파로 대통령을 역임했다. 하지만 [[의원내각제]] 체제였기에 실질적인 권한은 [[장면]] [[국무총리]]에게 있는 [[상징적 국가원수]]였다. 그마저도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을 때 박정희가 [[5.16 군사정변]]을 일으켜버렸다. 쿠데타 직후 박정희가 [[계엄령]]을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 윤보선을 만나러 [[청와대]]에 왔는데, 윤보선의 반응은 '''"올 것이 왔구나..."'''였다고. 장면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신파를 증오하던 윤보선은 쿠데타로 [[장면 내각]]이 축출된다는 사실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계엄령을 승인하고 반란군 진압을 포기해버린다. 반란군을 무력 진압할 것을 촉구했던 [[주한미군]] 사령관 매그루더는 "각하의 이런 결정으로, 앞으로 한국은 오랫동안 군부 통치가 계속될 겁니다." 라고 경고했다. 대통령 사임 이후 [[제5대 대통령 선거]]에서 [[민정당]] 소속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와 맞붙었다. 이 선거에서 윤보선은 박정희의 [[남조선로동당]] 전력을 들춰냈고, 이에 박정희는 [[매카시즘]]으로 몰아가지 말라며 반격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. '[[빨갱이]] 사냥' 때문에 수많은 피해자가 생겼던 [[경상도]]([[거창 양민 학살사건]]), [[전라도]]([[여수·순천 10.19 사건]]), [[제주도]]([[제주 4·3 사건]])에선 이런 [[종북몰이]] 수법을 쓰는 윤보선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박정희가 우세하게 되었다. 게다가 윤보선 진영에서 '''"[[부산광역시|부산]]과 [[대구광역시|대구]]에는 빨갱이가 많다."'''는 발언까지 함으로써 영남권이 발칵 뒤집혔다. 여기에 덧붙여 [[귀족]]적 성향의 윤보선보다는 [[서민]] 출신인 박정희가 [[농촌]]이 많았던 영호남 지역에서 지지를 얻기에 더 유리한 것도 있었다. 첫 번째 대결에서 근소한 차이로 진 다음에, 그는 스스로를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하였으며, 이후로 정신적 지주 등 '정신적'이라는 말이 꽤 유행하기도 했다. 하지만 [[제6대 대통령 선거|2번째 대선]]에서도 낙선하며 체면을 구기게 된다. 대선에서 2연속 낙선하긴 했지만, [[대한민국 제4공화국|유신시대]]에도 [[김대중]] 등과 함께 사회 원로로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. 윤보선은 1990년 7월 18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. 어쨌거나 대통령을 역임했기 때문에 [[국립현충원]]에 안장될 수도 있었지만, 그가 죽기 전 이미 이승만, 박정희 두 명의 [[독재자]]가 현충원에 안장됐다는 이유만으로 현충원 안장을 거부했기 때문에 유해는 현충원이 아닌 충남 아산에 위치한 가족 묘지에 안장됐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